26년 8월 2주차 인터뷰 발행
메리 커샛, 《아이의 목욕》
26년 6월 3주차 · NO. 05 · 죽은 화가와의 대화

NOT THE SALON

살롱에 걸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파리에서 스물일곱 해를 보낸 미국인 화가에게

메리 커샛프랑스 파리 · 1893년 5월구윤아6월 15일 (월) 발행3조회 0

여성은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갈 수 없던 시절이었다. 카페에 혼자 앉을 수도 없었다. 그가 실내를 그린 것은 취향이기 이전에 조건의 문제였다.

파리에 오신 지 스물일곱 해가 되었습니다.

스물둘에 왔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루브르에 사흘 있어 보니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겠더군요.

그때 여자는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인 교습을 받고 루브르에서 모사를 했습니다. 모사 허가증을 받으려면 줄을 서야 했고요.

집에서는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지요. 네가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걸 보는 게 낫겠다고.

그 말을 오래 기억했습니다. 미워서가 아니라, 그 말이 그 시대에 아주 평범한 말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유별난 분이었던 게 아닙니다.

살롱에 몇 차례 입선하셨는데, 이후 인상주의 쪽으로 옮기셨습니다.

살롱은 심사위원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그리게 만듭니다. 색을 조금 어둡게 하고, 윤곽을 조금 매끄럽게 하고. 나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겠더군요.

1877년에 드가가 우리 쪽으로 오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나는 곧바로 승낙했습니다. 드디어 심사위원 없이 일할 수 있겠구나 싶었지요.

그가 함께 일하기 편한 사람이었느냐 하면, 아닙니다. 말이 사납습니다. 다만 그림을 볼 줄은 압니다.

나는 심사위원의 눈에 맞춰 색을 낮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린 것들은 지금 봐도 남의 그림 같습니다.

주로 여성과 아이를 그리십니다. 그 소재를 두고 여성 화가라 그렇다는 말이 따라다닙니다.

그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남자 화가들이 그린 근대 파리를 보세요. 카페, 극장 뒷무대, 경마장, 술집. 나는 그런 곳에 혼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들어갔다면 그날로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세계는 실내였습니다. 응접실, 정원, 아이 방. 나는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 아이를 씻기는 일은 카페에서 술을 마시는 일보다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여겨져 왔을 뿐입니다.

메리 커샛, 《아이의 목욕》
《아이의 목욕》, 1893.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과 납작하게 겹친 무늬는 우키요에에서 왔다.

삼 년 전 우키요에 전시를 보셨습니다.

그해 봄 에콜 데 보자르에서 일본 판화를 크게 걸었습니다. 나는 몇 번을 다시 갔습니다.

충격이었던 건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명암으로 입체를 만들지 않는데도 화면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선과 색만으로 서 있습니다. 우리가 사백 년 동안 붙들고 있던 것이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다는 뜻이지요.

그 뒤로 판화를 열 점 만들었습니다. 드라이포인트와 아쿠아틴트로요. 인쇄공을 쓰지 않고 직접 찍었습니다.

미국의 수집가들에게 인상주의를 사라고 설득하고 계시다고요.

해브마이어 부인은 학교 다닐 때부터 알던 사이입니다. 그가 무엇을 살지 물으면 나는 정확히 말해 줍니다.

프랑스는 지금 자기 나라 화가들을 몰라봅니다. 그러면 그림은 아는 사람에게 갑니다. 언젠가 미국 미술관에 이 그림들이 걸릴 겁니다. 그때 프랑스가 아쉬워하겠지요.

메리 커샛은 1926년 여든둘에 죽었다. 말년에는 시력을 거의 잃어 붓을 놓았다. 그가 미국 수집가들에게 권해 건너간 그림 상당수는 지금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있다.

메리 커샛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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