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NLY A METHOD
나는 방법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막 내건 화가에게
이 년을 들인 그림이 마침내 걸렸다. 반응은 반으로 갈렸다. 스물여섯의 화가는 논쟁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 이 년이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이 년이 조금 넘습니다. 섬에 나가 그린 습작이 예순 점 가까이 됩니다. 나무 하나, 사람 하나씩 따로 그려 두었습니다.
큰 화면은 작업실에서 조립했습니다. 밖에서는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색 옆에 어떤 색이 와야 하는지 같은 것은 시간을 들여야 압니다.
— 사람들은 이 방법을 점묘라고 부릅니다.
그 말은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점을 찍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것은 색을 나누는 일입니다. 물감을 팔레트에서 섞으면 반드시 어두워집니다. 파랑과 노랑을 섞으면 초록이 되는데, 그 초록은 파랑보다도 노랑보다도 어둡습니다. 빛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섞지 않고 나란히 둡니다. 섞이는 일은 화면에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눈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두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분할이라 부르는 게 정확합니다.

— 인상주의 화가들과 같은 전시장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화면은 전혀 달라 보입니다.
그분들이 연 문으로 들어간 것은 맞습니다. 다만 그 안에서 다른 쪽으로 걸었습니다.
인상주의는 순간을 붙잡으려 합니다. 빛이 변하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여야 하지요. 나는 그 반대입니다. 나는 변하지 않는 규칙을 찾고 싶습니다. 어떤 색 옆에 어떤 색을 두면 사람의 눈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 그건 날씨와 상관없이 언제나 같습니다.
감각이 아니라 법칙이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시를 본다고 하지만, 나는 방법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 화면 속 마흔여덟 명이 아무도 서로를 보지 않습니다. 일요일 오후인데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는 평이 있습니다.
섬에 여러 번 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다들 쉬러 나왔는데 각자 다른 데를 보고 있습니다. 옆 사람과 말을 섞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고쳐서 그릴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인물을 옆모습이나 뒷모습으로 세운 것도 그래서입니다. 정면을 주면 이야기가 생깁니다. 나는 이야기를 만들려던 게 아닙니다.
— 액자 안쪽에도 점을 찍으셨더군요.
그림이 벽으로 넘어가는 자리가 남습니다. 거기서 색이 끊기면 그때까지 쌓은 것이 다 흐트러집니다.
흰 액자에 걸면 화면이 탁해집니다. 금색 액자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테두리도 화면의 일부로 칠했습니다. 번거롭지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 이 방법을 따르는 젊은 화가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시냐크가 열심입니다. 피사로 선생도 한동안 이쪽으로 오셨고요.
다만 걱정도 있습니다. 점을 찍는 것만 따라 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그 자리에 그 색인지가 없으면 그냥 얼룩입니다.
방법은 물려줄 수 있지만 판단은 물려줄 수 없습니다.
이 대화의 시점으로부터 다섯 해 뒤인 1891년 3월, 쇠라는 감염성 질환으로 갑자기 죽었다. 서른한 살이었다. 남긴 대작은 일곱 점이다.
